2026.01.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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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허인기자 정치칼럼] 필리버스터 정국, 민주주의의 방패인가 정치의 교착인가

다수의 결정이 소수의 저항에 가로막히고, 소수의 문제 제기가 다수의 책임 회피로 이용되는 순간, 필리버스터는 민주적 토론의 장치가 아니라 정치적 교착의 상징으로 변한다.

㈜한국탑뉴스 송행임 기자 |

[허인기자 정치칼럼] 필리버스터 정국, 민주주의의 방패인가 정치의 교착인가

▲허인기자

필리버스터 정국은 국회의 시간이 멈춘 듯한 착시를 만든다. 발언대 위에서는 말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정작 법과 제도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다수의 결정이 소수의 저항에 가로막히고, 소수의 문제 제기가 다수의 책임 회피로 이용되는 순간, 필리버스터는 민주적 토론의 장치가 아니라 정치적 교착의 상징으로 변한다.

 

본래 필리버스터는 다수결의 폭주를 막기 위한 안전판이다. 충분한 숙의 없이 밀어붙이는 입법에 제동을 걸고, 소수 의견을 공론장으로 끌어올리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정국의 극단화 속에서 이 제도는 종종 전략적 지연 수단으로 소비된다. 설득보다 시간 끌기, 논증보다 소모전이 앞설 때, 국회는 토론의 공간이 아니라 체력전의 무대가 된다.

 

문제는 필리버스터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정치의 태도다. 여당은 “민생이 발목 잡힌다”며 절차 단축을 외치고, 야당은 “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무제한 발언에 나선다. 양측 모두 옳은 말을 하지만, 국민의 시선에서 보면 둘 다 불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속도와 저지의 대결이 아니라, 왜 이 법안이 지금 필요한지, 어떤 쟁점이 해소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국회에 기대를 걸었던 시민이다. 민생 법안과 제도 개혁은 정치적 전술의 부수적 희생물이 되고, 책임의 공은 상대에게 떠넘겨진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국회는 ‘결정하지 않는 기관’이라는 인식에 갇히고,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은 깊어진다.

 

해법은 제도의 폐지가 아니라 사용의 절제다. 필리버스터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핵심 쟁점이 분명하고, 대안이 제시되며, 공개적 설득이 동반될 때 그 정당성은 살아난다. 동시에 다수는 숫자의 힘에 기대기보다 수정과 보완을 통해 합의의 폭을 넓혀야 한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다.

 

필리버스터 정국은 국회의 성숙도를 드러내는 시험대다. 말이 많아질수록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토론이 결론으로 이어질 때, 저지는 개선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필리버스터는 민주주의의 방패로 기능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긴 발언이 아니라, 더 설득력 있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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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행임 기자

한국탑뉴스에서 사회부와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기자입니다.